불교강좌 지상불교대학
1. 불자의 자세와 행동
불교에 입문하여 부처님 말씀을 마음으로 받아들인 불자라면 행동이나 마음가짐이 예전과는 달라야 한다. 부처님 말씀에 어긋나는 삶을 살고 있지 않은지, 부끄러운 불자는 아닌지, 늘 깨어 있는 마음으로 자신을 되돌아보아야 한다.

불교에는 불교만의 예절과 의례가 있다. 처음 불교를 접하는 불자들에게 108배 등의 절 수련이나 경전 독송, 참선 등이 낯설고 어색할 것이다. 그러나 불교 예절의 근본정신은 부처님을 생각하고 그 가르침을 되새기며 행하도록 하는 데 있기 때문에 불교 예절을 익히고 행하는 것이 깨달음을 향한 첫걸음이라 할 수 있다.

불자는, 아침에는 하루를 참되게 보내겠다는 발원으로 시작하고, 잠자리에 들 때는 원망이나 미움을 품지 않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마무리해야 한다. 음식을 먹을 때도 먼저 합장하고 감사한 마음을 내며 온 생명을 살리는 정신을 마음 속 깊이 새기고, 맛에 탐닉해서 과식하지 말아야 한다. 후회되는 일이 있거나 삿된 유혹에 흔들릴 때, 우환이나 어려운 일이 있을 때는 부처님께 간절히 기도를 올리고, 스님께 상담하는 것이 좋다.

삼보에 귀의한 불자로서 평상시 모든 행이 겸허해야 하며, 특히 수행 도량인 절에서는 더욱 정숙하고 경건해야 한다. 행동과 자세는 마음을 담은 몸짓이기 때문이다. 경건하고 겸허한 마음가짐은 불자의 기본자세이다. 1) 차수와 합장 차수叉手는 수행 도량에서 합장을 하지 않고 서 있거나 걸을 때 취하는 손의 자세다. 차수는 손을
어긋나게 마주 잡는다는 뜻으로, 왼손 손등 부분을 오른손으로 가볍게 잡는 것을 말한다. 서있을 때는 차수한 손을 하단전 부분에 자연스럽게 갖다 대고, 앉아 있을 때는 차수한 채로 무릎 위에 단정히 올려놓으면 된다. 이 때 왼손과 오른손이 바뀌어도 괜찮다.

합장(合掌)은 불자들이 가장 많이 취하는 자세로, 인도의 전통 인사법이다. 두 손바닥을 마주 대서 함하는 것을 합장이라고 하는데, 마주 닿은 손바닥 사이에 틈이 있거나 손가락 사이가 벌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두 손을 모아 마주하는 것은 마음을 모은다는 뜻이며, 나아가 나와 남이 둘이 아니라 하나의 진리로 합쳐진 한 생명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합장은 법회 등 불교 의식이나 의례 때 부처님께 예를 올리는 자세이다. 불자끼리는 합장한 채 머리를 숙여 반상대방에게 존경하는 마음으로 인사한다. 합장은 서 있거나 앉아 있을 때 취할 수 있다.

동작으로 볼 때는 차수에서 합장, 또는 합장에서 차수로 연결되어야 자연스럽다. 수계식 때에는 장궤합장을 하는데, 무릎을 바닥에 대고 다리를 세운 채 합장을 하는 것을 가리킨다.

2. 좌선 자세와 꿇어앉는 자세
좌선(坐禪) 자세는 앉아서 참선할 때의 기본자세이다. 부처님을 비롯하여 역대 위대한 수행자들이 이 자세로 수행하셨고, 오늘날의 수행자들도 이 자세로 앉아 용맹정진 한다. 좌선 자세는 결가부좌(結跏趺坐)반가부좌(半跏趺坐)가 있다. 결가부좌는 오른쪽 다리를 왼쪽 허벅지 위에 올려놓고, 왼쪽 다리를 오른쪽 허벅지 위에 올려놓은 자세이다. 이 때 두 다리를 허벅지 깊숙이 올려놓아야 자세도 안정되며 오래 유지할 수 있다. 반가부좌는 좌복 위에 앉아 왼쪽 다리를 오른쪽 다리 위에 올려놓거나길상좌, 오른쪽 다리를 왼쪽 다리 위에 올려놓는다.항마좌.

꿇어앉는 자세는 독경이나 염불을 할 때 주로 취한다. 오래 유지하기는 어렵지만 예경이나 축원을 할 때는 건강에 이상이 없는 한 이 자세를 취해야 한다. 무릎을 꿇고 앉을 때는 절할 때처럼 오른발을 밑에 두고 그 위에 왼발을 ‘X'자로 올려놓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힘든 자세임을 감안하여 각자의 습관대로 발을 바꾸거나 두 발을 나란히 놓는 등 편하게 해도 좋다. 꿇어앉는 자세를 취할 때는 허리를 곧추세워 몸의 평형을 유지해야 한다.

3. 절의 의미와 공덕
절은 불교 의식 때 가장 많이 하는 동작이다. 삼보(三寶 : 佛ㆍ法ㆍ僧)에 대한 예경과 상대방을 존경하는 마음의 표현이며, 자신을 스스로 낮추는 하심(下心)의 수행 방법 중 하나이다. 절 자체가 하나의 훌륭한 수행법으로 자리 잡아 가고 있으며, 참회나 기도의 방법으로 108배, 1080배, 3000배 등을 한다.

예부터 절을 많이 하면 건강과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남들에게서 신뢰와 호감을 얻으며, 스스로 두려움이 없어지고, 부처님께서 항상 보호해주시며, 훌륭한 위엄을 갖추게 되고, 죽어서 극락에 태어나며, 마침내 깨달음을 이룰 수 있다고 한다.

(1) 반배(半拜), 합장저두(合掌低頭)
삼보에 예경을 올릴 때는 큰절을 하는 것이 원칙이나, 다음의 경우에는 반배를 한다.
(※ 반배하는 법은 오체투자 사진1 참조)

절 입구에서 법당을 향하여 절할 때
길에서 스님이나 법우(法友)를 만났을 때
법당 밖에서 불탑에 절할 때
야외에서 법회를 할 때
동참 대중이 많아서 큰절을 올리기 적합하지 않을 때
3배나 108배, 1080배, 3000배 등의 오체투지를 하기 전과 마친 뒤
부처님께 헌화를 하거나 향, 초 등의 공양물을 올리기 직전과 올린 뒤
법당에 들어가거나 나오기 전
기타 필요 시

(2) 오체투지(五體投地)
삼보에 예경을 올릴 때는 오체투지의 큰절을 하는 것이 원칙이다. 오체는 몸의 다섯 부분인 두 팔꿈치와 두 무릎, 이마를 말한다.
오체투지는 몸의 다섯 부분을 땅에 닿게 엎드려 하는 절이다. 온몸을 땅에 던져 절을 하면서 공경하는 이를 마음 속 깊이 받드는 것이다.

오체투지 하는 방법은, 우리나라에서는 전통 예법인 큰절의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되, 반드시 몸의 다섯 부분이 땅에 닿아야 한다.
오체투지는 자신을 무한히 낮추면서 상대방에게 최대의 존경을 표하는 동작으로서, 가장 경건한 예법이다.

* 큰절하는 동작을 순서대로 따라해 보자.

먼저 서 있는 자세에서 합장 반배를 한다. 그런 다음 고개를 자연스럽게 숙이며 무릎을 꿇고 앉는다.
엉덩이를 발뒤꿈치에 붙이면서 양 손으로 바닥을 짚고 오른발 위에 왼발을 ‘X'자로 올려놓는다.
양 손으로 바닥을 짚을 때는 손끝을 15° 정도 안으로 오므린다. 이마, 양 팔꿈치, 양 무릎을 바닥에 대고 엉덩이는 발뒤꿈치에 붙인 자세가
오체투지이다.

접족례는 엎으려 절하면서 부처님의 발을 받는 것으로, 마음을 다해 부처님께 존경을 표하는 행위이다.
접족례를 할 때는 손바닥을 위로 하여 귀밑 높이까지 올리되 부처님의 발을 조심스레 들어 올려서 내 머리를 부처님의 발을 댄다는
기분으로 한다.

일어설 때는 엎드릴 때와 정반대 순서로 하는데, 먼저 손바닥을 다시 뒤집어 두 손을 거두고 합장하면서 다리를 풀고 본래의 자세로
일어선다.

(3) 고두례(叩頭禮)
절을 아무리 많이 한다 해도 부처님을 향한 지극한 예경의 마음을 다 표현할 수는 없다.
그래서 절을 다 마치고 일어서기 전, 부처님의 한량없는 공덕을 생각하며 지극한 마음으로 한 번 더 머리를 조아리는 것이 고두례이다.
유원반배(唯願半拜)라고도 하는데, 무수히 예경하고 싶은 마음의 아쉬움을 표하는 예법이라 할 수 있다.
고두례는 3배뿐 아니라 108배를 비롯, 3000배 등 모든 절의 맨 마지막에 올린다.

고두례는 마지막 절을 마치고 나서 일어서기 직전, 오체투지한 상태에서 고개를 들고 두 손을 얼굴 앞에서 모아 합장하는 것이다.
이 때 손끝이 약간 들리도록 하되, 머리 바깥쪽으로 나가지 않도록 한다.
그런 다음 손바닥과 이마를 바닥에 대고 일어서는 것이 고두례이다.

(4) 사찰예절
사찰은 부처님을 모시는 신성하고도 장엄한 곳이다. 속세의 번뇌를 씻고 마음을 깨끗이 하는 곳이며, 자신의 잘못을 참회하고 올바른
삶을 다짐하는 곳이다. 그리고 스님들이 상주하면서 공부하고 수행하는 도량이기도 하다.

사찰에 가면 일주문(一柱門), 금강문(金剛門), 천왕문(天王門), 불이문(不二門 또는 解脫門)을 지나치는 것이 통례다.
사찰의 중심인 큰 법당에 이르는 길은 여러 개가 있지만, 반드시 정해진 출입문을 통해 들어 가야 한다.

사찰의 들머리인 일주문을 들어서면서부터는 부처님의 도량이므로 마음을 가다듬어야 한다. 일주문에서 법당을 향해 합장 반배를 올리면서부터 사찰 예절이 시작된다. 절에서 항상 가운데(御間)통로를 피해야 한다. 부처님 법을 믿고 따르는 이는 항상 자기를 낮추고 다른 이들을 공경해야 한다. 사찰 안에서는 경건한 몸가짐으로 좌측통행을 하는 것이 좋다. 옷차림 또한 단정해야 한다. 지나치게 노출이 심한 옷이나 생
명을 경시한 모피 옷 등은 절에서는 삼가야 할 옷차림 이다.

일주문을 지나 사천왕을 모신 천왕문을 만나면 같은 방법으로 반배의 예를 올린다. 사천왕은 불교를 보호하는 수호신이다. 법당에 이르기 전에 역대 조사 스님의 부도(浮?)를 지나게 되면 역시 합장 반배를 한다. 도중에 스님이나 법우(法友)를 만나도 합장 반배를 해야 한다.

절에 와서는 제일 먼저 법당에 들어가 참배를 하고 나서 볼일을 보는 것이 불자의 예절이다. 격을 갖춘 사찰에서는 일주문, 천왕문, 해탈문을 지나서 곧바로 올라가면 대웅전 마당에 이른다. 마당에 모신 탑전에 예배를 드리고 계단을 올라가면 비로소 법당에 이른다. 법당 앞의 탑에는 부처님 사리가 모셔져 있다.
사리를 모신 탑은 부처님의 몸과 마음을 담고 있으므로 부처님 대하듯 반배로 3배의 예를 올린다.
탑을 돌며 기도할 때는 탑을 오른쪽으로 돈다. 이것은 왼쪽보다 오른쪽을 중시하는 인도의 전통 예법을 따른 것이다.

법당 아래 계단을 오를 때는 좌측통행을 하는 것이 좋다. 중앙계단과 좌우에 계단이 따로 있으면 좌우 계단을 이용한다.
법당에 들어갈 때는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 놓아야 한다. 정갈한 마음은 신발 벗는 태도에서도 나타나는 것이다.
지팡이나 우산을 가져온 경우, 법당 벽에 기대어 놓지 않도록 한다.

(5) 법당예절
법당으로 들어가는 문은 여러 개가 있다. 정면에 중앙 문이 있고 좌우 양쪽 옆에 각각 하나씩 문이 더 있다. 그리고 법당 좌우의 측면에도
문이 하나씩 더 있는 것이 우리나라 법당의 일반적인 구조다.

법당 안에는 불보살님을 모신 상단(上壇)과 좌우에 신중단이 설치되어 있다. 주존불이 모셔져 있는 주좌(主座)를 기준으로 가운데 통로가
어간(御間)이고, 정면으로 난 가운데 문이 어간문이다. 법당을 출입할 때는 어간문을 이용해서는 안 되고 옆쪽 문이나 좌ㆍ우측의 문을
이용해야 한다.

법당은 부처님을 모시고 스님과 불자들이 예불하고 정진하는 신성한 장소다. 문을 열고 닫을 때나 걸을 때 정숙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의
기도 정진에 방해가 된다. 법당 문을 열고 닫을 때는 오른손으로 문고리를 잡고 왼손으로 오른손 손목을 공손히 받쳐 잡은 뒤, 문을 약간
들어 올려서 열고 닫아야 소리가 나지 않는다.

법당에 들어서면 상단의 부처님을 향해 합장하고 반배를 올린다. 공양물을 올리거나 참배하기 위해 움직일 때는 합장한 자세로 조용히
걸어야 한다. 가운데 통로인 어간으로 다녀서는 안 되며, 부득이 어간을 지나갈 때에는 합장한 자세로 허리를 굽히고 통과한다.

향과 초는 자기 몸을 태워 좋은 향기와 밝은 빛을 중생들에게 회향함으로써 공양의 참뜻을 보여주는 공양물이다.
촛불과 향불이 이미 피워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꼭 자기가 준비한 것을 다시 올리려는 것은 불자로서 올바른 태도가 아니며,
공양의 참의미를 망각한 행동이다. 따라서 촛불과 향불이 피어 있을 때는 자신이 준비해 온 공양물을 불전에 놓고 3배만 올리고 나온다.

향을 올릴 때는 합장한 자세로 조용히 걸어가 불단 앞에서 반배를 올린다. 오른손으로 향의 중간을 잡고 왼손으로 오른 손목을 받쳐 잡고,
촛불에 대서 향에 불을 붙인다. 손으로 불꽃을 끄고, 향을 이마 높이로 올려 경건한 마음으로 예를 표한 뒤 향로 중앙에 반듯하게 꽂는다.
합장한 자세로 반배하고 제자리로 돌아가서 참배를 드린다.

불단에 향공양을 올린 다음에는 신중단(神衆壇)으로 가서 같은 방법으로 향을 올리고 참배한다.
법당 안이 복잡할 때는 그 자리에서 방향만 틀어 참배해도 된다.

법당을 나올 때는 먼저 법당 안에 다른 사람이 남아 있는지 확인한다. 아무도 없을 때는 촛불을 끄고 정돈한 후 나온다.
촛불을 끌 때는 손이나 촛불을 끄는 도구를 사용하고, 입으로 불어 끄지 않는 것이 예의이다.
법당은 대부분 목조건물이므로 화재를 조심해야 한다.

촛불을 끈 다음, 뒤로 물러서 합장 반배하고 법당을 나온다. 나올 때에도 들어갈 때와 마찬가지로 합장한 자세로 법당 옆문으로 와서 상단의 부처님 전에 합장 반배한 수 뒷걸음으로 법당 문을 나온다.

법당을 나와 신발을 찾아 신되, 뒷사람은 앞사람이 다 신을 때까지 차분한 마음으로 기다린다. 자기 신발을 다 신은 뒤에는 다른 법우들의
신발을 신기 편한 자리에 옮겨 놓거나 가지런히 정리한다.

다음은 법회나 예불 등 대중들이 많은 법당에서 자주 일어나는 눈에 거슬리는 행동들을 모아 보았다.

어간에 앉는 행위
아는 사람의 자리를 미리 잡아 놓는 행위
좌 복기도할 때 스는 방석을 풀썩거리며 깔거나 한 손으로 던져 놓는 행위
좌 복을 밟고 다니는 행위
사용한 좌 복을 정리하지 않고 나가는 행위
남이 올린 초나 향을 빼내고 자기가 준비한 것으로 바꾸는 행위 등

(6) 법회와 예불에서의 예절
법회와 예불은 불교 신행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예불은 하루를 시작하고 마무리하면서 부처님께 예를 올리는 의식이고, 법회는 부처님 말씀을 배우고 익히며 불자로서의 삶을 다짐하는 시간이다. 그러므로불자들은 법회와 예불이 있을 때는 반드시 참석하여 부처님께 정성스런 마음으로 참배하고 설법에 귀
귀 기울여야 한다.

다만 예불은 사회생활을 하면서 여러 여건상 동참하기 힘들지만, 수련회 등의 행사나 기도ㆍ수행 및 기타의 일로 사찰에서 자는 경우에는 반드시 참석해야 한다. 새벽 예불에 참석할 때는 도량석 목탁소리가 들리면 잠자리에서 일어나 세수를 하고 자리를 정돈한 다음, 맑은 정신으로 동참해야 한다.

법회는 불자 신행 생활의 중심이다. 법회를 통해 부처님 말씀을 공부하고, 불자로서의 몸가짐을 익히며,다른 불자들과 도반의 정을 도탑게 할 수 있다. 그렇게 익힌 부처님 말씀을 이웃에 널리 전하는 것도 불자의 의무이자 도리이다. 진리를 모르는 삶은 어둠 속에서 등불 없이 길을 가는 것과 마찬가지다.

법회는 일정한 의식에 따라 진행된다. 그러므로 법회에는 시간에 맞춰 참석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동참해야 한다. 특히 바닥에 앉는 법당 구조상 법회 도중에 들어오거나 나가는 것은 경건한 분위기를 해치기 쉽다. 설법만 들으려고 설법 시간에 맞춰 들어오거나, 또는 설법이 끝나면 바로 나가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 또한 적절하지 못한 행동이다. 급한 일이 있어 어쩔 수 없이 도중에 나가야 할 때는 미리 출입하기 쉬운
자리에 앉았다가 방해되지 않게 움직인다.

설법 내용을 잘 안다고 해서 가볍게 여기거나 너무 어렵다고 포기해서는 안 된다. 아는 내용은 다시 한 번 새겨서 듣고, 모르는 것은 더
공부해서 이해하려 해야 한다.

다음은 일반적으로 사찰에서 행하는 법회 식순이다. 그러나 법회 식순은 각 사찰의 전통과 특성에 따라 다를 수 있다.

① 삼귀의례 - 삼보께 지극한 마음으로 귀의하는 의례. 노래로 부르는 경우가 많다.
② 반야심경 봉독 - 지혜의 완성을 염원하며 다 함께 읽는다.
③ 찬불가 - 부처님을 찬탄하는 노래
④ 청법가 - 법사를 청하는 노래
⑤ 입 정 - 법문 듣기에 앞서 흐트러진 마음을 가다듬는 시간
⑥ 법 문 - 부처님의 교법을 간절히 듣는다.
⑦ 정근 및 헌공 -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며 정성껏 마련한 보시금을 불전 함에 넣는 의식
⑧ 발원문 - 부처님의 교법에 따라 수행하고 실천하겠다는 원을 세운다.
⑨ 사홍서원 - 네 가지 큰 서원을 실천하겠다는 다짐의 노래
⑩ 기타 - 공지사항 등 (※ 법회 의식의 내용은 부록 참조)

(7) 스님에 대한 예절
스님은 삼보에 속하는 출가자로서 재가불자에게는 스스로가 같은 공경의 대상이다.
재가자는 스님 가까이에서 가르침을 받을 수 있고, 수행자의 진정한 모습을 본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언제 어디서나 스님을 대할 때는 존경의 마음으로 합장 반배해야 한다. 불교에 대해 궁금한 것이 있으면 재적 사찰의 스님이나
평소 존경하는 스님을 찾아가 가르침을 청하고 법문을 들으면서 신심을 견고히 해야 한다.

길에서 스님을 만나면 그 자리에 서서 합장반배하고, 실내에서는 3배의 예를 올려야 한다. 때에 따라서는 1배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스님이 좌선 중이거나 경행할 때, 공양할 때, 양치질이나 목욕할 때, 누워 있을 때는 절을 하지 않아도 된다.

스님을 모실 때는 스님과 마주 서거나 스님보다 높이 서 있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작게 말해도 잘 들리도록 가까이에서 모셔야 하며,
불편하게 느끼시지 않도록 주의한다. 또한 스님이 권하기 전에는 자리에 앉지 않으며, 묻지 않으면 말하지 않는 것이 예의이다.

큰 스님을 뵙고 가르침을 얻고자 할 때는 먼저 시자(侍者)를 통해 허락을 받는 것이 절차이다. 스님 방에 들어갈 때는 법당에 들어갈 때와
같이 행동해야 하며, 큰 스님께는 3배를 올리는 것이 예의다.

스님은 재가불자의 정신적 지도자가 되기 위해 정진하는 출가 수행자이므로, 수행에 불편함이 없도록 옷이나 음식, 약 등을 정성껏 공양해야 한다. 스님들이 더욱 정진하여 참다운 스님이 될 때 재가불자 또한 그 가르침을 받고 깨달음의 길로 나아가는 진정한 불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8) 공양 예절
향ㆍ초ㆍ꽃ㆍ쌀ㆍ차ㆍ과일 등의 시물(施物)을 부처님께 바쳐 목마르고 배고픈 중생에기 회향하고, 중생의 고통을 여의게 해주는 것을
공양이라고 한다. 전통적으로 향ㆍ초ㆍ꽃ㆍ쌀ㆍ차ㆍ과일은 육법공양이라 해서 중요시해 왔다. 공양(供養)이란 원래 스님들에게 수행에
필요한 여러 가지 물건이나 음식을 드려깨달음의 텃밭을 일구게 한다는 의미이지만, 삼보께 올리는 정성스러운 모든 것은 다 공양의 의미로 확대 되었다. 법회 때 찬탄의 노래를 부르는 것을 음성공양이라고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온 마음을 다해 바치는 정성스러운 공양은 삼륜(三輪)이 청정할 때, 즉 받는 이, 받는 물건, 주는 이가 청정할 때 크나큰 공덕이 뒤따른다고 한다.

한편 불교에서는 밥 먹은 것도 ‘공양’이라 한다.
밥 먹는 행위도 하나의 의식이자 수행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 방울의 물에도 부처님의 은혜가 스며 있고,

한 알의 곡식에도 많은 사람의 노고가 담겨 있습니다.

몸과 마음을 바로 하여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이롭게 하고자 하는 발원을 세웁니다.

<공양게>


이 <공양게>에는 공양을 하는 마음가짐이 잘 드러나 있다. 즉 위로는 부처님의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위한 이 타행을 하고자 음식을 먹는 것이다. 한 톨의 쌀이 내 입에 들어오기까지 농부를 비롯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정성과 노력이 있었는지를 살피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 때문에 밥알 하나도 함부로 버리지 않는 것이 불가의 풍습이다.

공양법에는 크게 상공양과 발우공양이 있다. 상(床)공양은 일반 가정에서처럼 밥상이나 식탁에서 공양 하는 것으로 공양하는 사람 수가
적을 때 하는 공양법이다. 발우鉢盂공양은 불교 전통식 공양법으로, 많은 대중이 같이 공양하거나 수련회 및 수행 시에 한다.
대중이 함께 모여 정진하는 도량에서는 발우공양을 하는데, 여러 사람이 함께한다고 해서 이를 대중(大衆)공양이라고도 한다.

발우는 스님들의 밥그릇을 말한다. ‘발(鉢)’은 산스크리트 의 음역인 발다라(鉢陀羅)의 약칭이며 ‘우(盂)’는 밥그릇을 뜻하는 한자이다. 발우는 수행자에게 합당한 크기의 그릇이라는 뜻으로 ‘응량기(應量器)’라고도 번역한다.

발우공양의 절차에는 부처님과 음식을 만든 사람들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과, 중생의 고통을 깊이 생각하고, 공양을 먹고 얻은 힘을 모든 중생에게 회향하겠다는 다짐이 담겨 있다.

부처님께서는 당시 인도의 수행 풍습대로 매일 사시(巳時) : 오전9시~11시에 한 끼 공양을 하셨는데, 커다란 그릇 하나에 시주 받은 음식을 다 담에 드신 데서 유래하였다. 발우공양은 음식물 쓰레기가 심각한 환경문제로 대두된 요즘, 이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좋은 대안이 되고 있다. 불교계에서 시작해사회 전체로 퍼져가고 있는 ‘빈 그릇 운동’도 이 발우공양 정신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9) 재가불자끼리의 예절
출가하지 않고 가정생활을 하면서 불법을 닦는 이들을 재가불자라고 한다. 재가불자끼리는 ○○법우님,○○거사님, ○○보살님 등으로 불러야 하며, 법명이 있으면 앞에 법명을 붙여 부르는 것이 예의이다.
길이나 절에서 만나면 합장 반배로 정중히 인사하고, 법회 중일 EO는 목례를 나눈다.

가까운 불자가 경조사를 당했을 때는 즉시 찾아가 도와야 하며, 어려운 일이 있을 때는 자기 일처럼 생각하고 함께 해결해야 한다.
재가불자 사이에 시비가 있을 때는 화합정신으로 화해해야 한다.

제2장 불교란 무엇인가
불교는 어떤 종교인가? 과연 부처님이 오랜 수행 끝에 깨달으신 것은 무엇이며, 감히 우리 같이 평범한 사람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가? 불교를 아는 것이 우리 삶에 어떤 도움이 될 것이며, 부처님 말씀대로 사는 삶이란 어떤 삶인가?

아마 불교에 입문하기에 앞서 누구나 이런 의문들을 한번쯤은 품어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나름대로 정의를 내리고 불교에 첫발을 내디뎠으리라. 물론 앞으로도 이런 의문들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고, 또한 진리를 향해 정진하는 데 소중한 동기로 작용할 것이다.

부처님은 분명 진리의 길을 가르쳐주셨지만 무엇을 추구하며 어떤 삶을 살 것인가는 우리가 선택해야 할 몫이다. 그 선택에 불교는 하나의 커다란 나침반이 될 것이다.
불교는 어떤 종교이며, 부처님이 말씀하신 지혜로운 삶은 어떤 것인지 공부해 보자.

1. 종교란 무엇인가
지구상에는 다양한 민족이 고유의 문화를 이루며 어울려 살아왔다. 그래서 민족과 문화의 특성에 따라 다양한 종교가 생겨났다. 종교의 일반적 정의와 불교에서 말하는 종교에 대해 알아보자.

‘종교(宗敎)’란 한자 뜻 그대로 풀면 최고의 가르침, 인생과 세상에 대한 궁극적인 가르침이다. 그래서 종교는 인간의 삶 그 자체를 문제 삼으며 그것을 몸소 해결하여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고자 하는 가르침이다.
일반적으로 종교는 교주ㆍ교리ㆍ교도가 있어야 성립한다.

올바른 종교를 찾아서 믿고 몸소 행하는 것은 한 사람의 삶에 대단히 중요하다. 어쩌면 삶 자체가 달라지는 일이 될 것이다. 사람들은 어렵고 힘든 일이 생길 때 종교에 의지하여 그 질곡에서 빠져나가고자 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어떤 전능한 존재에게 의지하려는 속성이 있다. 산, 해, 달, 하늘, 심지어는 태풍에도 신이 있다고 믿어 예배 대상으로 삼는 경우도 있다. 이 때문에 인류 역사에 신이라는 개념이 생겨났다. 본 사람이 아무도 없는 신이 인류를 다스린다고 한다. 이처럼 신을 절대적으로 믿는 가르침이 유신론(有神論)적 종교이다.
유신론적 종교에서, 인간은 신의 피조물이므로 절대적인 복종과 절대자의 품 안에서만 인간의 가치를 구현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신을 절대적으로 믿는 종교를 부정하고 ‘인간이 무엇이며, 죽은 뒤 어디로 가는가’ 하는, 인생과 우주의 궁극적인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결과 크게 두 가지 흐름의 종교가 정립되었다. 바로 신을 따르는 종교와 진리를 믿고 행하는 종교이다.

신을 믿는 종교는 세계가 신의 창조물이고, 인간은 신의 형상을 닮은 자로서 만물을 지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절대적 신을 믿는 것은 대체로 서양의 종교관이다. 서양 종교에서 신은 절대적 존재이므로 인간은 그 신에게 절대 복종해야 한다.

그런데 교통과 통신 등 과학 문명이 발달하면서 동양 등 다른 세계를 접하게 되자, 서양에서는 자기중심적인 틀에서 벗어나 종교를 새롭게
해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혀 다른 세계관과 가치관을 만나게 된 것이다.
즉 걸림이 없는 자유와 지극한 행복이 신만이 아니라 내 자신 속에도 있고 삼라만상 속에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서양인들은
생각의 편협성을 깨닫고 마침내 다양한 종교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오히려 우리는 안타깝게도 그들 스스로 편협하다고 인정한 서양의 종교관과 가치관에 갇혀 있는 형편이다. 불교에 입문하는 사람은
이러한 서양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 나야만 비로소 참된 진리를 만날 수 있다.

깨달음을 믿고 행하는 종교는 인류 역사에 불교 하나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의 가치는 인류 역사에서 더욱 빛이
나고, 부처님은 인류의 대 스승으로서 손색이 없는 것이다.

진리를 모르고 사는 세상은 고달프지만 진리를 알고 행하는 삶은 자유롭고 평안하다. 불교를 처음 만난 사람들은 불교의 진리야말로 나를
바꾸고 세계를 변화시키는 원동력임을믿고 열심히 정진해 나가면 마침내 참된 삶을 만들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2. 불교란 무엇인가?
(1) 진리에 대한 깨달음

불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행하는 종교다. 그러므로 불교의 교주는 부처님이다. 그러나 부처님 스스로 한 번도 당신이 세상의 절대자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 다만 세상의 진리를 먼저 깨달았다고 말씀하셨을 뿐이다. ‘불교’ ‘불(佛)’이란 고대 인도어인 산스크리트 ‘붓다(Buddha)'의 음사로 ’깨달은 사람 ‘이란 뜻이다. 그렇다면 무엇에 대한 깨달음인가? 바로 진리에 대한 깨달음이다.

불교에서는 누구라도 진리를 깨치면 부처가 될 수 있다. 진리를 깨치면 신조차 초월할 수 있는 것이다.
절 입구에 서 있는 사천왕들은 본디 하늘에 사는 신이었는데,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고 감격한 나머지 부처님께 귀의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영원토록 부처님 법을 보호하겠다는 원력을 세우고 스스로 발심하여 부처님 도량을 지키고 있다. 이처럼 불교의 진리는
하늘의 신을 감동시킬 뿐만 아니라, 그 경지조차 뛰어넘는 가장 수승한 가르침이다.

삶을 당당하게 사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삶의 결과도 자못 다르다. 불교의 진리는 우리가 당당하게 살 수 있는 지혜를 준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완성하겠다고 굳게 결심하고 그 믿음을 지키며 사는 사람은 자신의 목표에 더욱 가까워질 것이고, “난 안 돼” 하면서
소극적이고 부정적으로 사는 사람은 그만큼 더 목표와 멀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 있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바른 진리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진리를 깨닫고 행하면서 사는 삶은 얼마나 자유롭고 행복하겠는가. 불교는 바로 이 길을 제시하고 있다.

(2) 삶을 직시하여 그 해답을 제시

우리의 삶은 어떤 것일까? 그것을 궁금해 하며 해답을 찾아 헤매다 일생을 마치는 사람들도 있다.
한평생을 살면서 목숨 걸고 그 해답을 찾는 것은 진정 가치 있는 일이다. 우리의 삶이란 나도 늙고 병들고 죽는 생로병사(生老病死)
일대사 인연을 해결하는 과정이라고 한다. 말은 쉽지만 태어나는 일만 생각해봐도 얼마나 고생스럽고 힘든 일인가?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받는 작은 상처 하나에도 사느니, 못 사느니 힘겨워한다. 그리고 큰 병에 시달리거나 평생을 서로 의지하던 사람의
죽음에 직면했을 때 그 고통과 아픔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 그렇듯 돌아보면 삶의 많은 시간이 즐거움보다 괴로움과 고통으로 얼룩져
있다. 환희의 시간보다 슬픔과 후회의 시간이 더 길고 많다. 그래서 삶을 고해(苦海), 고통의 바다라고 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왜 사는지, 왜 이 길을 가야하고 그 끝에는 무엇이 있는지, 끝도 모를 삶을 그저 안개 낀 다리를 건너는 사람처럼 어림짐작으로 살고 있다. 이렇듯 길을 모르면서 그저 어둠 속을 헤매듯 살아온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인생은 모르면서
사는 것”이라고 했다.

모르고 사는 삶을 알고 살아가는 삶으로 바꾸어주는 가르침이 바로 불교이다. 모르고 짓는 죄가 더 무섭다는 말이 있다.
죄를 지어도 그것이 죄인지 모르는 사람은 아무런 가책 없이 그 행위를 반복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죄를 저지르면 벌을 받고, 그것이 나와
남에게 아픔을 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다시는 죄를 짓지 않을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불교는 우리가 어떻게 태어났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해답을 주고 있다. 이에 대한 부처님의 말씀을 들어보자.

어떤 사람이 벌판을 걷고 있었다. 그 때 갑자기 뒤에서 성난 코끼리가 달려왔다. 그는 코끼리를 피하기 위해 마구 달리기 시작했다.
한참 달리다 보니, 몸을 피할 작은 우물이 있었다. 우물에는 마침 칡넝쿨이 있어서 급한 나머지 그것을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아래를 내려다보니 우물 바닥에는 무서운 독사가 혀를 널름거리고 있었다. 두려움에 위를 쳐다보았더니 코끼리가
아직도 성난 표정으로 우물 밖을 지키고 있었다. 게다가 어디선가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려 주위를 살펴보니 흰 쥐와 검은 쥐가 번갈아가며 칡넝쿨을 갉아먹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뿐만 아니라 우물 중간에서는 작은 뱀들이 왔다 갔다하면서 그를 노리고 있었다.
그는 두려움에 떨면서 칡넝쿨을 잡고 매달려 있었다. 그 때 어디선가 벌 다섯 마리가 날아와 칡넝쿨에 집을 지었는데,
그 벌집에서 꿀이 한 방울씩 아래로 떨어졌다. 그는 그 꿀을 받아 먹으면서 달콤한 꿀맛에 취해 자신의 위급한 상황을 잊은 채,
꿀이 왜 더 많이 떨어지지 않나 하는 생각에 빠졌다.

이 이야기는 《불설비유경(佛說譬兪經)》 ‘안수정등도(岸樹井藤圖)’에 나오는 인생에 대한 비유다.
여기서 코끼리는 무상하게 흘러가는 세월을 의미하고, 칡넝쿨은 생명줄을, 검은 쥐와 흰 쥐는 밤과 낮을 의미한다.
작은 뱀들은 가끔씩 몸이 아픈 것이고, 독사는 죽음이며, 벌 다섯 마리는 인간의 오욕락(五欲樂)을 말한다.
오욕이란 재물욕, 색욕, 식욕, 명예욕, 수면욕을 말한다. 이와 같이 자신의 처지를 잊은 채 탐욕의 꿀맛에 취해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어리석은 인생이다.

어떤 사람은 욕망이 없다면 인생의 의미가 없지 않느냐고 물을 것이다. 그러나 욕망으로 얻는 것보다 욕망 때문에 잃는 것이 더 많다.
눈앞의 이익에 집착하는 마음은 지혜를 흐리게 한다. 이러한 어리석음을 없애고 참된 지혜를 발현토록 해야 한다.
어리석음으로부터 깨어날 때 우리는 코끼리와 독사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깨닫는 순간 코끼리도, 우물도, 두 마리의 쥐도,
독사와 뱀도 말끔히 사라지고 완전한 자유와 진정한 기쁨을 누리게 된다.

(3) 주인공은 나 자신
때때로 만원 버스나 지하철에서 “웬 사람이 이렇게 많은 거야!”라고 짜증을 내는 사람을 본다. 그 사람은 자신도 그곳을 복잡하게 만드는
장본인임을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모든 일의 주인공은 바로 나이다. 어떤 일에서든 남을 탓하기에 앞서 자신이 그 일의 주인공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면 불교에서는 이러한 상황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지옥에 있는 사람은 자신만을 위해 산다. 먹을 것이 있어도 자기만 먹으려고 한다. 하지만 지옥의 숟가락은 너무 길어 자기 수저로 제 입에 밥을 넣을 수가 없다. 그래서 지옥에 있는 사람들은 언제나 상대방을 원망하면서 굶주리고 산다. 눈앞에 먹을 것을 두고도 말이다.

그러나 극락에 있는 사람들은 이웃을 먼저 생각하며 산다. 그래서 먹을 때는 서로서로 먹여주기 때문에 그 곳 사람들은 지옥 사람들과
달리 모두 맛있게 먹으며 행복하게 산다.

이는 지옥과 천상에 대한 비유이기도 하지만, 오늘날 우리들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귀중한 교훈이다.자신만을 위해 탐욕스럽게 사는 사람과 이웃과 더불어 사는 사람의 삶은 대조적이다. 이처럼 자기중심적인 삶을 이웃과 함께하는 삶으로 바꿀 때, 괴로움의 세계가 자유와 평안의 세계로 바뀔 것이다. 대립과 갈등, 고통으로 얼룩진 세계를 바꿔나가는 원동력은 세계의 구성원인 나 자신이다. 즉 세계를 바꾸는 것은
신이라는 절대적 존재가 아니라 주인공인 자기 자신의 지혜와 그 지혜로 말미암는 걸림 없는 행위이다.

(4) 믿음과 수행을 겸비한 종교

불교는 믿음과 수행을 겸비한 종교이다. 그래서 불교는 믿음과 더불어 스스로 노력하는 수행을 강조하며,그런 수행을 통해 인간의 정신과 삶을 획기적으로 바꾼다.

인류의 위대한 스승인 부처님을 믿고, 나아가 나 자신이 본래 부처라는 사실과 진리를 믿어 자신을 비추어 보며, 이웃 중생의 아픔을 덜어주고 함께 사는 아름다움을 추구해 나가는 것이 불교이다. 절대자에게 무조건 빌어 용서를 받고 그에게 귀속되어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간직하고 있는 불성을 깨워 내 자신의 주인공으로 사는 것이 곧 믿음과 수행을 겸비하는 불교의 참모습이다.

수행이란 혹독한 시련으로 자신을 단련하는 고행과는 다르다. 진리를 깨치기 위해 탐욕에 찌든 자신의 잘못된 습관을 좋은 습성으로 바꾸어 마침내 깨닫는 과정이다. 그 과정에서 사람의 근기(根機) : 사람이 가지고 있는 근본 바탕에 따라 다양한 수행체계가 형성되고, 그것이 사상체계를 이루면서, 다시 수많은 조사스님들과 수행자들이 그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다.

이처럼 수행을 중시하는 불교의 특징은, 절대자로부터의 구원만을 중시하고 유일신을 강조하는 다른 종교와 차별되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불교도 부처님에 대한 전적인 믿음을 통한 구제의 길도 열어 놓지만, 결국에는 내면의 힘을 키워 궁극적으로는 깨달음의 길로 향한다. 나를 철저히 버리고 그것이 부처님 마음으로 변하는 내면의 변화는 믿음과 수행을 통해 이루어지며, 이 점을 강조한 것이 불교이다.

(5) 지혜의 길
부처님 가르침을 지혜의 가르침이라고 한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지혜이다. 지혜 없이는 깨달음도 없다. 그러면 지혜는 지능지수가 높은 것을 말하는가? 아니다. 지혜는 지능이나 지식과는 다른 개념이다.

지혜로운 사람이 되려면 먼저, 생각을 바르게 해야 한다. 바른 생각에서 지혜가 나오기 때문이다. 즉 자기중심적인 생각에서 벗어나 자신과 전체를 통찰할 때 지혜가 열린다. 부처님은 지혜의 길을 어떻게 설명하셨을까?


너희들 비구여, 만일 지혜가 있으면 곧 탐착(貪着)이 없어지는 것이니,
항상 스스로 자세히 살피어 그것을 잃지 않도록 하라.
이것은 우리 법 중에서 능히 해탈을 얻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사람은 이미 도인도 아니요 또 속인도 아니라,
무엇이라 이름 붙일 것이 없느니라. 실지혜(實智慧) : 진리를 달관하는
참다운 지혜는 곧 늙음과 죽음과 병듦의 바다를 건너는 굳건한 배요,
또한 무명(無明)의 어둠 속의 큰 등불이며, 모든 병든 자의 좋은 약이요,
번뇌의 나무를 치는 날카로운 도끼이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마땅히 듣고,
생각하고, 닦는 지혜로써 자기를 더욱 길러야 한다.
만일 사람이 지혜의 빛을 가졌다면, 그것은 비록 육안(肉眼)이지만
그는 밝게 보는 사람이다. 이것을 지혜라 하느니라.

《불유교경》


그렇다면 지혜의 가르침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담고 있는가?
첫째, 무명(無明)에서 벗어나라고 한다. 어리석은 생각을 버리라는 말씀이다. 비록 원수 사이일지라도 처지를 바꾸어 생각하거나 원망과
욕심을 버리면 함께 차 한 잔 나눌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긴다. 대립과 갈등의 원인은 자신의 욕망 때문이다.

화가 났을 때, 자기 마음을 잘 관찰해 보면 화의 원인이 다른 사람에게도 있지만, 자신에게도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상대가 자기가 바라는
만큼 해주지 않았거나 자기에게 불이익을 주었기 때문에 화가 난 것이다. 그 또한 자기 욕심에서 비롯된 감정이다. 시간이 흐른 뒤에 돌이켜보면 당시의 화가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었는지 깨닫게 된다. 이것이 진리를 보지 못하게 하는 무명(無明)이다.
이 무명에서 벗어나야만 비로소 밝은 지혜의 눈을 뜰 수 있다.

둘째, 자신의 무지가 모든 불행과 비극의 시초임을 알았다면, 그 다음은 남을 나처럼 생각하라는 것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뒤에
오는 결과를 생각하지 않고 행동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지혜로운 사람은 행동에 앞서 그 결과를 생각하고, 어리석은 사람은 생각에 앞서서 행동부터 한다
잘못된 행동 때문에 고통과 아픔이 생긴다. 따라서 눈앞의 이익에 연연한 행동과 욕망에서 벗어나면 지금까지 보지 못 했던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불교는 바로 이러한 세계를 열어 보여주며,그 길을 함께 가고자 하는 가르침이다.

(6) 참 나를 찾아서

잠 못 드는 사람에게 밤은 길고
피곤한 나그네에게 길이 멀듯이

진리를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에겐

생사의 밤길은 길고도 멀어라.

《법구경》《우암품愚闇品》


우리 삶은 올바른 진리의 길에 들어설 줄 모르고 감정과 욕망에 이끌려, 마치 뱀의 꼬리가 앞장서서 길을 가려는 것과 같다.
그래서 가시덩굴에도 들어가고 불 속에도 뛰어들고 결국에는 낭떠러지에 떨어지는 격이다. 이를 두고 원효 스님은 <발심수행장>에서
“중생이 불타는 집에서 윤회하는 것은 끝없는 세상에서 탐욕을 버리지 못한 탓이다”라고 하였다.

참나, 본래의 청정한 나를 찾으려면 먼저 탐욕을 버려야 한다. 참 나는 곧 진리요, 깨달음이다. 그래서 참 나를 찾아가는 길은 곧 깨달음을
향한 길이다. 참 나를 찾지 못한 사람은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 사람이요, 그런 사람에게 생사의 길은 멀고도 험하다.

부처님께서 어느 날 숲 속 나무 아래에서 좌선을 하고 계셨다. 이 때 젊은이들이 숲 여기저기 무엇인가를 찾아다니다가 나무 아래 조용히 앉아 있는 부처님을 보고 다급하게 물었다.

“한 여자가 도망가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까?”

사연인 즉, 그들은 근처에 사는 지체 높은 집안 자제들인데, 50명이 저마다 아내를 데리고 숲에 놀러왔다. 그 중 총각 한 사람이 기생을 데리고 왔는데, 모두 노는 데만 정신이 팔려 있는 사이에 그 기생이 여러 사람의 옷과 값진 물건을 가지고 달아나버린 것이다. 그래서 그 여인을 찾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사정을 듣고 난 부처님은 그들에게 물으셨다.

“젊은이들이여, 달아난 여인을 찾는 것과 자기 자신을 찾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

자기 자신을 잊고 여인을 찾아 헤매던 그들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자기 자신을 찾는 일이 더 중요합니다.”

“그럼, 다들 거기 앉아라. 내가 이제 그대들을 위해 자기 자신을 찾는 법을 가르쳐주겠다.”

젊은이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모두 부처님 제자가 되었다.

《사분율》제32권


이 젊은이들은 자신이 더 중요함을 깨달아 출가했지만, 어리석은 사람들은 탐욕과 욕망의세계로 계속 달려가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 탐욕의 끝은 파멸이요 절망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항상 탐욕을 버리라고 말씀하셨다. 《사십이장경》에 따르면,
부처님께서도 왕자의 지위를 문틈에 비치는 먼지처럼 보고, 금이나 옥 따위의 보배를 깨진 기왓장처럼 보며, 비단옷을 헌 누더기같이
보고, 삼천대천세계를 한 알의 겨자씨 같이 보아 궁궐을 버리고 출가하여 위대한 깨달음을 얻으셨다
이것은 부처님께서 세속의 탐욕을 벗어났음을 몸소 보여주신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늘 당신을 ‘길을 가리키는 사람’이라 말씀하셨다. 부처님은 만나는 사람 모두에게 괴로움에서 벗어난 지혜와 평화의 길을
가르쳐주셨다. 부처님께서는 우리에게 깨달음과 깨달음으로 가는 길을 몸소 가르쳐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깨달음을 이루고, 못 이루고는
우리에게 달린 것이다.

고려시대 야운(野雲)스님은 자신의 수행을 살피는 글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많은 사람이 부처님 법 안에서 도를 이루었는데, 그대는 어찌하여 아직도 고해苦海에서 헤매고 있는가. 그대는 시작 없는 옛적부터 이생에 이르도록 깨달음을 등지고 속진俗塵에 묻혀 어리석은 생각에 빠져 있구나. 항상 악업惡業을 지어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지고 착한 일을 하지 않으니, 생사生死의 바다에 빠진 것이 아닌가.

《초발심자경문》

3. 진리를 향한 정진
(1) 삼귀의(三歸衣) - 올바른 믿음의 출발

일상적인 삶을 살다 불교에 입문하려고 첫 마음을 냈다면, 그 순간부터 바른 믿음을 가지고사는 참다운 불자가 되어야 한다.
참다운 불자가 되려면 먼저 지극한 마음으로 삼보(三寶)에 귀의해야 한다.

삼보란 세 가지 보배라는 말로, 부처님(佛)과 부처님의 가르침(法)과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제자(僧)를 말한다.
이 삼보에 신명을 바쳐 믿는 것을 삼귀의(三歸衣)라고 한다. 귀의란 돌아가 의지한다는 말로, 지금까지의 잘못된 믿음과 생각을 버리고
참다운 진리의 세계에 안주하여 살아간다는 뜻이다.

부처님께 귀의한다는 것은, 진리를 깨쳐 우리에게 보여주신 따사롭고 인격적인 부처님의 품에 안기는 것이다. 진리를 온몸으로 구현한
온화하고 대자 대비한 부처님을 내가 안주할 수 있는 섬으로 여기고 귀의하여 흔들림 없는 마음의 확신과 안정을 얻는 것이다.
그 다음 진리 그 자체인 법에 귀의하는 것이 법귀의이다. 스님들께 귀의하는 것은 부처님과 법에 따라 수행하고 가르치는 스님들을 믿고
따르는 것이다. 즉 좋은 벗과 복 밭인 거룩한 스승에게 귀의하는 것을 말한다.